
맷은 심기가 불편했다. 사람 많은 파티야 한두 번도 아니고 하물며 사람 북적이는 펍에서도 웃고, 먹고, 마시기까지 했지만 오늘은 모든 감각이 아우성이었다. 전날 다섯 블록 떨어진 빌딩 아래 어두운 골목에서 마약을 거래하며 총기까지 꺼내 드는 현장을 정리해서인지 오늘 아침 두통이 골을 울렸다. 흩날리는 마약 가루야 수백 번 마주했다지만 피로가 누적된 탓이었다. 현재 ‘NELSON, MURDOCK & PAGE’ 사무소는 제법 큰 사건을 맡게 되면서 두 달여 간 일에 매몰되어 있었다. 처음 시작은 근무하던 회사에서 유해 물질에 지속해서 노출되어 병을 얻고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근무를 그만두어야 했던 피해자였다. 비싼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소송 걸 여유가 없는 피해자를 법률적으로 도와주다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비단 피해가 한 명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포기와 맷, 그리고 캐런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썹을 들썩였다. 이걸 그냥 넘어간다면 다시 데어데블을 뉴욕 일간지 일면에서 보게 될 것이니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쉰 포기는 부정하지 않는 맷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뛰어난 촉으로 문제를 파고들 줄 아는 캐런과 깊은 마음으로 모두의 의견을 들어 중간을 잡아주는 포기는 아예 맷이 데어데블로 활동할 수 있는 리퀘스트를 내어주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의뢰이니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가는 각오하라는 으름장이 무서워 맷은 순순히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 삶의 끝자락을 함께 달려준 이들을 밀어내는 바보 같은 짓은 충분했다. 오늘은 기업이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해 주요 정보를 듣고 장부를 빼어오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제법 위험할 수 있는 일인지라 캐런과 포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피스크의 본거지에 맨몸으로 쳐들어간 과거에 비하면 이건 너무나 쉬운 일이라 그들을 안심시켰던 맷은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들려온 불안정한 심박수에 불쾌한 컨디션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파티는 생각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향수, 음식, 가드들이 소지하는 총기 냄새. 온갖 냄새에 색을 덮는 소음들.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을 빗겨보는 시선이야 익숙한 일이라 보이지 않는 척 바닥을 두들겨 가며 의자에 앉아 주변 동태를 살펴본다. 어느 마음씨 좋은 서버 한 명이 다가와 건네준 샴페인 잔까지 들고 있으니 그럭저럭 파티에 초대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하하, 후원금은 좋은 곳에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믿고 후원한 돈이니 좋은 일에 쓰일 거로 의심치 않습니다. 저번 프로젝트도 훌륭히 해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근 몇 달간 지겹도록 들은 목소리가 드디어 가깝게 들린다. 먼저 거리를 좁히기에는 눈에 띌 것 같고 그를 엄호하는 경호 인력도 신경이 쓰였는데 잘된 일이다. 샴페인을 뿌려 발목을 잡아 두거나 먼저 말을 걸어 대화를 잇는 건 위험이 커 선택지에 두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통해 목표물을 붙잡는 일. 그게 계획의 첫 번째 단계였다. 그리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샴페인 잔 하나를 더 든 맷이 눈여겨본 이를 향해 간다. 그림을 모으는 취미가 있으며 특히 아직 주목받지 못한 원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타겟으로 정한 놈보다 많은 부를 손에 쥔 이는 파티장에 들어선 내내 동선을 크게 바꾸지 않고 있었다. 그럴 필요도 없이 주변에는 사람들이 꼬였고 격식의 가면을 썼지만 동조하지 않는 심장 박동을 들으며 그의 앞에 선 맷은 잠깐 확인의 시간을 거친 뒤 Thanks, 잔을 가져가는 이의 미소에 자신의 잔을 들었다. “제가 앞을 보지 못해서 먼저 잔을 부딪치지 못하는 게 다행이네요.” “왜죠? 잔이라도 깨트릴 것 같나요?” “매력적인 분을 앞두고 긴장해서 매력 없게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안경 너머 눈이 휘어져 눈꼬리가 접힌다. 별 볼 일 없이 느낀 남자의 목소리와 말에서 호감도가 올라간 여자는 먼저 자기소개를 건넸다. 습관적으로 손을 건네었다가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의도치 않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대화는 이후로도 즐거웠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꼭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깊이가 깊었다. “사실 이번 파티도 그 화가의 작품을 보러 왔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아, 정확히는 ‘보이는 척’하는 거겠지만요.” “머독 씨는 오히려 저보다 많은 걸 보는 느낌이 드는걸요. 꼭 평범한 사람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는 세 번째 눈을 가진 사람처럼요.” “그럴지도 모르죠. 보이지 않는데도 이렇게 모든 게 뛰어난 분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요.” “당신은 정말 사람을 웃게 하는 재주가 뛰어나네요.” “It’s my pleasure.” 대화를 나누는 동안 타겟으로 정한 놈의 걸음에 한 시도 신경을 거두지 않은 맷이 그의 시선이 드디어 이쪽을 향하자 고개를 살짝 튼다. 본론을 말하기 위한 서론은 충분히 깔아두어 언제고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도 어색함이 없다. 자신이 빠진 후 남은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기거나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눈앞의 상대가 지금 다가오는 놈에게 흥미를 가질 만한 소재를 잔뜩 던져놓은 맷은 놈의 걸음이 자신들에게 향하자 쉼표 같은 마침표를 찍었다. 단칼에 이야기를 자르기보다는 여운을 두어 걸음을 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된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 보이지 않도록 복도로 나가 열린 문틈 새로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하니 다행히 모든 건 예정대로였다. 놈은 그의 환심을 사야 했기에 격식을 차려 행동하고 있었고, 그는 자신이 들려준 놈이 소유하고 있는 여러 그림 작품들에 흥미를 느끼고 있기에 이야기는 쉽게 끝날 수 없었다. 아마 시간이 조금 흐르면 그를 수많은 그림이 걸린 층으로 데려갈 터였다. 목표물이 그에게 느끼는 높은 호감도는 행동을 이어질 이유가 충분했다. 그림들은 지하에 걸려 있어 장부가 모인 고층과 층계 차이가 난다. 멀수록 시간 끌기가 용이하기에 지체하지 않고 비상구로 이동한 맷은 지팡이를 구석에 두고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중요한 물건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삼엄한 경비는 당연했다. 다른 층과 달리 그 층만 감시 카메라와 기계실이 따로 있어 일단 기계로 이루어지는 경비를 마비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비상구 문을 열기에 앞서 이상함을 감지한 맷은 고개를 갸웃대며 천장 구석에 자리한 CCTV를 올려다봤다. “….” 누군가 먼저 손을 썼다. 짙은 화약 냄새, 조심스럽지만 주저함이 없는 걸음걸이. 오래 만난 익숙한 느낌은 아니지만 뇌리에 강하게 남은 신체적 특성들이 기억 이곳저곳을 두드려 정체를 밝혀내려 애쓴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적일 가능성이 높다. 총소리도 내지 않고 단말마의 비명도 없이 급습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쉬운 상대는 아니라 신체 감각을 극대화한 맷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이가 다름 아닌 기억이 옅어지고 고통이 희석되어 잊고 있었던 이름, 퍼니셔라는 걸. 이토록 강렬하게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아 헛웃음을 터뜨린 맷은 넓은 복도에서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중앙을 가로질렀다. 펄떡대는 숨소리가 들리고 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험하게 생존하는 이에게서 나는 냄새가 새어 나오는 곳. 거기에 퍼니셔가 있다. 피로가 누적되어 감각이 과부하가 걸렸다 하더라도 지척에 있는 인기척을 놓칠 만큼 고장 나지 않은 맷은 기계실 문을 벌컥 열었다. “Oh boy. 일은 벌써 끝내고 온 건가 red.” “퍼니셔.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손전등을 입에 물고 전선이 복잡하게 얽힌 기계 내부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프랭크는 낯선 이의 침입에 총을 들었다가 정체를 확인하고선 도로 등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여기에 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프랭크에 표정을 구긴 맷은 손전등을 물어 불분명한 발음에 불친절하게 손전등을 뺏었다. “변호사로 있을 때랑 아닐 때 성격 다른 거 아니었나. 지금은 꼭 그 붉은 코스튬을 입을 것처럼 구는데.” “퍼니셔 널 변호사로 만날 일은 저번 날 이후로 다시는 없는 줄 알았는데.” 제법 뼈 있는 단언에 헛웃음을 켠 프랭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맷을 마주 본다. 샌님 같은 변호사는 유순한 듯 보이다가도 괜히 법정에 서는 사람이 아닌지 말로 사람을 난장질하는 능력이 대단했다. 거기에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급소를 피해 아픈 부분만 때리는 재주도 뛰어나 몸으로 부딪친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처음 이곳을 목표로 잡았을 때부터 ‘NELSON, MURDOCK & PAGE’ 사무소가 엮어있다는 걸 알고선 살인은 계획에서 접은 부분이다. 적으로 만나면 좋지 않지만 아군으로 만나면 누구보다 든든한 조력자라는 걸 경험으로 느꼈기에 프랭크는 쓸모없는 기 싸움을 이어가지 않았다. “오늘 여기서 사람 죽일 일은 없어. 나도 너랑 피차 마찬가지로 정보만 빼내러 온 거니까 쓸데없이 싸우지 말자고.” “…….” 퍼니셔의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는 고개가 잔잔하다. 심장 울림이 일정하고 목소리도 여전한 것으로 보아 거짓말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맷이 손을 뻗어 대뜸 그의 몸 곳곳에 장착된 총들을 뺏어 해체하더니 구석으로 밀어 던졌다. 주인 아닌 다른 사람 손에 날아간 총을 보는 프랭크의 눈빛이 잠시 매서웠으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안경을 통해 자신을 쳐다보는 초점 없는 눈을 본 프랭크는 총 대신 먼저 빼앗긴 손전등을 낚아챘다. “나도 내 호신용이라는 게 있어 red.” “그래서 네 수트 안쪽에 자리한 다른 날붙이들은 가만히 뒀잖아. 물론 그게 사람을 해치려 한다면 언제든 저 총 같은 꼴이 날 거야.”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보다 정확히 상태를 파악하는 맷에 손전등 불빛을 안경 앞에서 움직여본다. 자신의 시각 상실을 의심해서가 아닌 일종의 장난 섞인 보복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 맷은 손전등을 쳐내지 않았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스스로 장난을 멈춘 프랭크는 열린 기계판 문을 발끝으로 두드렸다. “좋아. 원래는 네가 시간을 끌어줄 동안 내 할 일 마치고 가려 했는데, 이렇게 마주친 이상 협력을 제안할 수밖에 없네.” “협력?” “이미 알고 있겠지만 지금 여기 있는 경호 인력 절반은 다른 층으로 빼돌렸고 나머지 절반은 잠시 기절시켜서 방에 처박아 뒀어.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고. 이 긴박한 시간 싸움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법. 모르진 않겠지.” “…협력도 서로의 패를 하나씩 던지고서 하는 거지. 지금 넌 내가 뭘 위해 여기 왔는지 알고 있지만 난 네가 무슨 정보를 얻으려 여기로 온 건지 몰라. 그걸 모르는 이상 난 너와 협력할 수 없어. 이미 아픈 상처도 있어서 말이야.” “…최근에 시카고에서 여기로 넘어온 갱이 있어. 여기 회사가 뒤를 봐주고 있는 모양인데 저질러온 증거가 필요해. 난 그걸 찾으러 왔을 뿐이야.” 시카고 갱이라. 여러 일과 엮어있다는 건 알았지만 다른 state에서 넘어온 갱까지 포함된 줄은 몰랐다. 물론 사건을 더 파헤치면 줄줄이 나오겠지만 갱 관련 문제는 낮의 맷 머독이 아닌 밤의 데어데블에게 어울릴 일이라 굳이 세 사람이 함께 일하는 범주 안에 가지고 올 필요는 없었다. 프랭크가 파헤친다면 사람 목숨 여럿이 사라지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우선순위는 강자에게 당한 피해자들의 보호인지라 맷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돌렸다. 조건이 썩 마음에 들어 보이지 않지만 협력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걸 보아 협정이 맺어졌다 여겨도 좋을 듯했다. “CCTV는 전부 처리 했고. 보안은 red, 너한테 맡겨도 되겠지.” “Remember. No killing.” “Altar boy.” 악수 따위는 가볍게 생략한 두 사람이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누군가 여기로 와서 둘을 발견한다고 해도 길을 잃은 게스트라 해도 믿을 단정한 용모로 기계실을 나가는 옷자락에는 폭력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 “Frank.” “Huh?” “여기. 이거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보안의 중심부를 맷이 찾아내고 그 중심부와 연결된 본체를 프랭크가 제거해 들어온 장소에는 서재처럼 빼곡한 철제 서랍장들이 가득했다. 비교적 최근 쓰인 잉크 냄새와 아주 오래된 종이의 냄새까지. 순차적으로 정리된 문서함을 훑어본 맷은 프랭크가 찾아봐야 할 범주를 알려주었고 이어서 자신이 찾는 문서함도 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감각이 발달한 맷이라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거짓이 아니기에 손으로 만져 파악하는 글자에는 한계가 있었다. 문서 중 제일 첫 장을 펼쳐 몇 글자를 더듬어 읽어본 뒤 필요 여부를 결정한 맷은 다소 난해한 내용이나 사진 같은 것들이 있는 종이는 프랭크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맷과 함께 일을 해 본 경험이라고는 개판이었던 재판과 격한 감정으로 벌인 몸싸움밖에 없는 프랭크는 새삼 그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걸 상기했다. 프랭크가 찾아낸 두꺼운 수첩 한 권과 자신이 가져가야 할 종이 뭉치 한 묶음을 마지막으로 놓친 건 없는 건지 돌아보던 중 맷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음에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프랭크 말로는 호흡기로 수면제를 들이마시게 해 잠재웠다 했으니 사람마다 일어나는 시간이 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깨어난 한 명이 묶여있는 스스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지 않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 보던 서랍장을 닫은 맷이 짐을 챙겨 들었다. “프랭크. 이제 나가야 해. 경호원이 깨어나고 있어.” “….” 군인으로 지낼 적 단 일초의 차이로 생사가 갈리는 걸 여러 번 본 프랭크가 별말 없이 보고 있던 종이를 넣어 놓고 서랍을 닫는다. 나가는 건 저쪽으로 나가야 해. 1층으로 가는 비상구가 연결되어 있어. 복도로 나와 들어왔던 곳 반대편을 가리키는 프랭크에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인 맷이 고개를 젓는다. “거기엔 층별로 경호 인력이 배치되어있어.” “어쩔 수 없군 그럼.” 소리 없이 죽이면 쉬운 일이지만 오늘 밤만은 살인이 허용되지 않으며 챙길 짐까지 있는 터라 순순히 발을 돌린다. 수백 번 싸우고 범죄 현장을 덮쳐 봤다지만 맷도 프랭크도 뛰어난 힘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기에 모든 상황이 긴장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소리 나지 않게 바쁜 걸음과 혹시 누군가를 만나지 않을까 삐쭉 경계심을 세우고 출입한 문을 연 두 사람이 비상구를 소리 나게 뛰어 내려간다. 두 개의 층을 내려갔을까. 갑자기 제 팔뚝을 붙잡아 멈춰 세우는 맷에 고개를 돌린 프랭크는 안경알 속 집중한 눈과 굳게 다물린 입술을 응시했다. “경호원들이 오고 있어. …3층 아래, 그리고 5층 위.” “이제야 눈치챘나 보군.” “총… 20명. 위, 아래로 10명씩이야.” “잘 나가는 기업이라서 그런가. 경호 인력 수도 남다르네.” 비꼬아 장난처럼 말하지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프랭크의 눈동자가 분주히 돌아간다. “어쩔 수 없네. 일단 여기로 들어가야지.” “잠깐, 거기는,” “……Oh, shit.” 맷이 부르기도 전에 멈춰선 층 비상구문을 연 프랭크는 드넓게 펼쳐진 홀에 헛웃음을 켰다. 파티에 미치기라도 한 건가. 이 건물에는 홀이 몇 개인 거야, 도대체. 숨을 장소도 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이 곧 펼쳐질 피의 무도회를 벌써 보여주는 것만 같다. 맷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지 길이 있다면 벌써 해답을 내놓았을 입이 조용하다. 그리고 펼쳐진 홀과 맷을 번갈아 보던 프랭크는 문득 그의 옷차림과 자기 옷을 보더니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인 건지 수첩과 종이 묶음을 홀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내려놓고 얼굴 쪽에 손을 뻗어옴에 맷의 손이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뭐 하는 짓이야.” “우리 협력 아직 끝난 거 아니지.” “지금 이게 협력과 무슨 상관,” “지금 몇 층에 있어 그 경호원들.” “…우리가 있었던 층.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어. …몇 명은 다시 나가서 다른 층으로 가는군. 아마 우릴 찾는 것 같아.” “Alright. 혹시 춤출 줄 아나 red?”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발언에 맷의 미간에 금이 간다. 그러나 요동 없는 심장 소리와 숨소리는 절대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물은 맷은 설명하자면 기니 일단 실례하겠다 말하고 안경에 손을 대는 프랭크를 말리지 못했다. 안경을 벗으니 훤히 드러나는 순한 눈매에 인상을 작게 찌푸렸던 프랭크는 맷의 양손을 마주 잡고 가깝게 몸을 붙였다. 가만히 있어도 짙게 들어오는 그의 체취가 안전거리도 없이 훅 끼쳐옴에 손을 털려던 맷은 오히려 꽉 붙잡아버리는 프랭크에 차오르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퍼니셔.” “위장술.” “뭐?” “그놈이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만난다는 건 red 너도 알고 있겠지. 오늘 넌 걔를 만나러 온 거야.” “말도 안 되는.” 프랭크와 맞잡은 오른손이 허공에 쭉 뻗어져 몸이 빙글 돌아간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왈츠 선율이 프랭크에게 들려올 리가 없을 텐데 그가 이끄는 움직임은 놀랍도록 음악 선율과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넌 춤을 잘 추지 못해서 그놈한테 가기 전에 나에게 먼저 춤을 배우려 한 거고.” “퍼니셔.” “지금은 프랭크가 더 낫지 않겠어, 맷?” “나와 불륜 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불륜이 아니라 조력자라고 해두지. 그리고 눈이 보이는 척도 해주면 고맙겠어.” 원치 않음에도 프랭크의 손과 발에 이끌려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총과 칼에만 익숙하리라 생각한 그는 정말 예상외로 부드럽게 몸을 움직일 줄 알았고 상대를 이끌 줄 알았다. 오히려 버벅대는 건 자기 쪽이라 맷은 정말로 프랭크에게 춤을 배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흐르는 클래식 음악. 퍼지는 웃음소리. 부딪치는 샴페인 잔. 모든 게 멀게만 느껴지는 중 유일하게 가깝게 실존하는 함께하는 움직임. 넓은 홀에 울리는 부드러운 바닥 쓸림이 맷의 눈꺼풀을 떨리게 한다. 그리고 사실 당황한 건 맷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위장술을 먼저 제안한 건 자신이지만 이렇게 가깝게 그를 보는 건 처음이라 초점 없이 맑은 눈과 고집과 다르게 동그란 코끝, 유창히 열리는 붉은 입술은 새삼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못 듣는 게 없으니 감각을 갈무리하는 게 맞으나 떠는 심장을 자의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프랭크는 움직이는 발선만 보려 무던히 노력했다. “…놈들은 어디까지 왔지?” “바로 위층.” 본 목적이라도 이야기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아 경호원들의 위치를 묻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가까워지는 여러 발소리를 청각으로 쫓아간 맷은 거리가 좁혀질수록 시선을 한 곳에 집중했다. 감각을 집중하기 위한 본능으로 움직임이 슬며시 느려지고 몸은 가깝게 붙어옴에 프랭크도 일부러 박자를 늦춘다. 시각을 대체하는 감각으로 머릿속이 바쁜 맷과 다르게 프랭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있는 건 맷뿐이라 그의 온 신경은 눈앞 상대에게 쏠렸다. 맷이 눈썹을 치켜올리면 덩달아 올라가고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따라간 프랭크는 몸을 살짝 떼었다 붙었을 때 구두 앞코를 밟는 발에 아프지 않은 탄성을 내뱉었다. 힘이 그리 실리지 않아 아프지 않았지만 놀람에 따른 반응이었는데 때마침 문이 열렸다. “거기 잠깐.” “오, 이런. 관객이 있는 줄 알았다면 더 신경 써서 움직였을 텐데. 부끄럽네요.” 능청스레 말하는 폼이 처음 가짜 연기를 제안했을 적 인상을 찌푸렸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일부러 발을 밟았나 싶을 만큼 쑥스럽게 웃는 맷에 일순 헷갈렸던 프랭크는 사람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지만 눈보다 30도 아래로 향해있는 시선에 한 걸음 앞서 경호원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여기 홀은 출입 금지 구역이었던가요?” “…모두 아래층에 있는데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춤을 배우기 부끄러워 여기서 따로 배우고 있었습니다. 이분이 워낙 춤을 잘 추셔서 제가 부탁을 드렸죠. 아까 보셨다시피 발을 여러 번 밟았는데도 화 한 번 내시지 않더라고요. 감사하게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춤을?” 의심 가득한 질문에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맷이 슬쩍 프랭크를 쳐다보았다가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 웃는다. 눈이 가려져 있었다면 모를까 눈매를 죄다 내보이고 짓는 미소는 어쩐지 섹슈얼한 분위기를 연출해 경호원들의 표정이 모호해진다. 그놈은 평소 성생활을 철저히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경호를 맡은 이들이라면 그가 남자와도 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직접 말하지 못하나 난감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선 직감이 생겼을 것이었다. 그리고 맷은 틀린 직감에 불을 지피기 위해 일부러 입술을 깨물어 말을 고르는 척했다. “꼭 추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한 번이라도 실수한다면 더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 같아서 도와달라 부탁하는 걸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춤이라는 게 긴장하면 더 못 추게 되는 법이니까요.”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프랭크가 먼저 입을 열어 맷을 변호한다. 보란 듯 그를 등 뒤로 세우고 말을 하자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은 경호원들은 프랭크를 쭉 훑어보았다. 일단 맷은 의심에서 멀어졌으나 갑자기 튀어나온 프랭크는 그들이 신뢰할만한 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도와준 답례는 충분히 해주겠다고 해서 기대하는 중이죠. 그가 저한테 뭘 줄지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충분한 답례. 자신들의 고용주와 춤을 추는 기회를 얻기 위해 낯선 이에게 가르침을 받은 남자가 가르쳐준 사람에게 답례하겠다고 한다. 외적 사실 그대로를 보면 이상한 문맥은 내면을 파고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경호원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모두 평정심을 덧씌웠으나 혐오감 혹은 저열한 욕망이 나오는 걸 맷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일단 이 건물을 나가는 일이라 끝까지 연기를 소홀히 하지 않은 맷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알려주지 않고 뒤 돌은 이들이 홀을 나서는 마지막까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Hey re,” “Shh….” 문이 닫히자 곧바로 평상시로 돌아가려는 프랭크를 붙잡아 세운 맷이 두터운 손을 다시 맞잡는다. 당황한 얼굴에 가까이 붙어 아직 그들이 문에서 멀어지지 않았음을 알려주자 프랭크는 대답 대신 몸을 움직였다. 탁탁. 발소리가 녹아들고 무게감 실린 턴이 몇 번 반복된 끝에 완전히 그들이 떠나갔음을 알린 맷은 뜨거움이 넘쳐 땀이 배어든 손바닥을 주먹 쥐며 프랭크에게서 떨어졌다. “이제 가도 돼.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까 얼른 나가는 게 좋겠어.” 움직임을 재촉하는 곧은 등을 따라 걸어가는 프랭크의 표정이 굳어있다. 그러나 매몰차다 할 정도로 자신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는 맷에 입술 끝을 문지른 프랭크는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 “내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 네가 날 따라오고 있는 것 같은데 퍼니셔.” “…배 안 고프나?” “뭐?” 서로의 목적을 달성했으면 인사 없이 헤어지는 게 떳떳하지 못한 히어로의 도리이건만 졸졸 쫓아오는 프랭크에 결국 뒤를 돌아본 맷은 황당한 질문에 어이없는 목소리를 냈다. “난 저녁을 못 먹어서 배가 고프네.” “그럼 알아서 피자 가게라도 가서 피자를 사 먹든가.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지?” “답례하겠다며.” “Ha?” “춤 가르쳐 주는 대가로 답례하겠다는 말 거짓이었나.” “그건 연기였잖아. 애초에 난 너한테 춤 배울 실력도 아니야.” “Oh, really? 아까 발 밟은 걸 보니 못 믿겠는데. 자존심 부리지 마 red.” 보이지 않지만 태연히 웃고 있을 얼굴이 얄밉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만 귓가에 들리는 거센 심장 소리가 그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헷갈려 신경이 날카로운데 그가 긁어내는 속이 자꾸만 뒤틀렸다. 평소 자신이라면 헛소리 말라 차갑게 내치고 갔을 테지만 맷은 주인을 모르는 심장박동이 거슬렸다. 그게 자신이 아닌 오로지 그의 것이라는 걸 확신하고 싶었다. “너야말로 형편없는 춤 실력으로 누구를 가르쳐 주겠다고 나선 거야. 내가 발 밟는 연기라도 안 했으면 당장 들켰을 정도로 형편없던데.” “글쎄. 발을 밟은 것도 연기였었나? 계속 내가 리드해서 그런지 네 실력을 못 믿겠어. 그렇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면 증명해 보라고 Matt.” 멍청한 도발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맷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응수하지 못한다. 춤을 추는 내내 느껴졌던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조금 높은 그의 체온이, 거친 군 생활을 했음에도 몸에 깃든 상대를 대하는 상냥한 손길이,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오던 시선이, 밤이 되면 더욱 모든 감각이 날뛰는 맷을 자극했다.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을 뜨겁게 했다. “넌 후회할 짓을 너무 많이 해 Frank.” 후회라는 단어와 가깝게 살아온 프랭크는 허를 찌르는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망가지지 않은 수트 차림과 구두에 옅게 남은 발 밟힌 자국을 달고 집으로 향하는 맷을 조용히 따라갔다. “이건 후회 안 할 짓이라는 건 알아.” 불어오는 바람에 묻힐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앞서간 이의 주먹이 뜻 없이 쥐었다 펴지고 뒤쫓는 이는 자신과 비슷한 반듯한 정장 차림의 앞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 이어서 두 사람이 도착한 집에는 오래도록 켜지지 않았던 조명이 켜졌으며 넓은 전광판에서 나오는 빛을 따라 어지럽게 얽히던 몸짓의 끝은 실크 이불이 깔린 침대였다. 어지러운 황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