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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당신에게_ 14/05/2022 (Sat.) 07:35 PM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맷은 제 앞에 주저앉은 남자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형편없이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가파른 호흡. 맷은 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벤자민 포인덱스터. 윌슨 피스크와 더불어 그의 가장 큰 절망과 두려움의 근원이 되었던 남자. 그는 제가 사랑하던 이들을 죽이려 했고, 랜텀 신부는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 뿐인가. 이 남자는 나딤을 죽였다. 아이에게서 아버지를 앗아갔다. 녹음된 테이프 속에서 고양이나 새 따위를 죽인 것을 뽐내듯 말하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제가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마냥 떨리는 손으로 제 옷자락을 붙든 남자의 떨리는 숨소리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인다. 맷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 절박한 목소리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었다. 맷은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저를 붙들고 애원하는 그를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저는, 맷, 저는……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런데 도무지 혼자서는, 아, 매튜, 제발……. 마지막 말은 숫제 울음이었다. 이 남자가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해칠까 두려움에 떨며 일어났던 아침은 차마 두 손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벤 포인덱스터와, 제 앞에서 무너져 내린 이 남자를 과연 같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기억하지 못하는 죄를 그에게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맷은 떠오르려 하는 기억을 다시금 삼켜냈다. 지금의 덱스는 세상에 떠밀린 채로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사람일 뿐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죄로 사람을 벌할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제게 누군가를 단죄할 자격은 없었다. 맷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당신을 도와줄게요.” 도무지 제 것 같지 않은 목소리. 거세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마치 끝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들렸다. 맷은 제 손을 움켜쥐는 덱스의 체온을 느끼며 제 비겁함을 조소했다. * “맷, 늦었네요.” 그의 목소리에서는 감출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난다. 그의 애정은 절대적이다. 조건 없고 분별 없는 애정. 제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맷은 저를 향한 덱스의 시선에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숨이 막히는 것만 같다. 벤자민 포인덱스터는 결코 그의 삶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제가 그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는 그저 모든 것을 감내하려 할 것이다. 그저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 할 뿐, 절대 저를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맷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로프트의 공기 사이로 그가 준비한 저녁 식사의 냄새가 섞여들었다. 라자냐와 레드와인. 철저하게 그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워진 식탁. 보이지 않는 족쇄가 발목에 감기는 것만 같다. 맷은 익숙하게 제 감정을 삼켜냈다. “오늘따라 일이 좀 많아서요.” 이제는 입에 붙어버린 거짓말을 주워삼킨다. 벤자민은 단 한 순간도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매튜 머독은 그의 유일무이한 북극성이므로.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드는 것만 같다. 맷은 익숙하게 제 겉옷을 받아드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단 한 순간도 제 말에 의문을 갖지 않듯, 저 역시 벤자민을 온전히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를 온전히 미워하기에는 누구에게도 손을 뻗을 수 없고, 어느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삶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이었으므로. “피곤해 보여요, 맷.” “괜찮아요.” 그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한층 더 빨라진 심장 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울린다. 저를 기민하게 살피는 시선이 자못 다정하다. 맷은 짐짓 모른 체 하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저번 주랑 똑같은 와인으로 사왔어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 같길래.” 그의 다정함에 잠겨 죽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단 한번도 원치 않았던 애정. 그러나 저는 그를 외면할 위인은 되지 못한다. 맷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은근히 맷도 취향이 까다롭단 말이에요. 아니, 그렇다고 싫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아, 음식 식겠다. 앉아요.” 완벽하리만치 그의 취향에 맞춘 식탁. 어느 것 하나 어긋남이 없다. 어그러진 것이 있다면 단지 목을 옥죄어오는 듯한 기분 뿐일테지. 그러나 그 정도는 감출 수 있었다.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숨기고, 내리누르면 된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맷은 익숙하게 선글라스를 벗어 협탁 위에 내려놓고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매번 고마워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매끄러운 거짓말을 내뱉는다. 그는 더 이상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올리려 하지도 않는 제 모습에 일순간 역겨움을 느꼈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를 눈치챈 것인지, 덱스의 숨소리가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맷은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는 억지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라디오라도 들을까요.” “맞아요, 맷 그런 거 좋아했죠.” 그의 주의를 돌리려 던진 말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형편없이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의 숨소리나 체취에서는 더 이상 긴장이나 불안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맷은 라디오의 전원이 켜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포크를 집어들었다. * 그의 요리는 언제나 완벽했다. 저를 향한 그 애정 어린 눈빛과 마찬가지로. 맷은 연거푸 와인을 들이켰다. 피곤에 지친 눈꺼풀이 점점 추를 매단 듯 무겁게만 느껴졌다. 라디오에서는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 밤을 즐기는 일에는 다른 어느 것도 필요치 않다고, 제게 필요한 것은 그저 싸구려 스릴일 뿐이라 노래하고 있었다. 맷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환희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절박하게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맷은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힘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어느 쪽이든 차이는 없을 것이다. 덱스는 익숙하게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맷은 그의 숨소리에 섞여든 떨림을 기민하게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고, 저는 기꺼이 그에게 그 기회를 줄 터였으니까. 맷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벤자민.” 그를 부르는 제 목소리가 낯설다. 형편없이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그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들린다. 엉성한 왈츠. 저를 리드하는 것도, 끌려가는 것도 아닌 허술하기 짝이 없는 스텝. 그러나 맷은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그를 온전히 증오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가 원했지만 번번히 내쳐졌던 사람들의 세계, 그것은 아홉 살의 매튜 머독을 버렸던 세계였으니까. 맷은 천천히 그의 움직임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라디오 속의 목소리는 외치고 있었다. 당신과 내가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이 밤을 즐기는 일에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맷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내리누르며 그의 허리에 제 팔을 둘렀다. 이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언제까지나 자신이었다. 그가 손을 놓으면 그대로 끝이 나 버릴 관계. 그러나 차마 그런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그와 함께 어깨를 맞대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단순한 동정이나 측은함 따위로 규정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맷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기약 없는 내일로 미루고만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자명한 진실로부터 눈을 가리기 위해서. 벤자민 포인덱스터는 그를 사랑할 수는 있어도 결코 저를 이해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었기에.

Benjamin Poindexter & Matt Murdock's Waltz
by 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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