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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가장한_ “근사한데요, 맷.” 맷이 현관문을 열어 맞이하자 카렌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턱시도가 정말 잘 어울려요. 검은색 정장 재킷에 흰 와이셔츠네요. 클래식해요. 그러자 맷은 검은색일 게 분명한 보타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근사한 건 당신의 미소인 걸요, 카렌.” 뻔하지만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맷의 매력적인 한마디에 카렌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 미소가 근사하다고요? 당신 능력이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죠. 제 능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요.” 맷도 마찬가지로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제 팔뚝을 각 잡아 카렌에게로 내밀었다. 평소라면 기꺼이 맷의 지팡이이자 시야가 되어주기 위해 팔을 내민 쪽은 카렌이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맷이 카렌을 에스코트하기로 한 날이라고나 할까. “카렌, 당신은 어떤 옷을 입었나요?” “궁금해요?” “자신의 파트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파란 드레스요. 민소매고, 쇄골이 드러날 만큼 적당이 파인 스퀘어넥이죠. 스커트 길이는 무릎을 살짝 덮는 정도고, 가슴엔 작은 진주 브로치를 달았답니다.” 맷은 자연스레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어깨를 쓸어보았다. 촉감이 아주 부드러운 고급 드레스였다. 마치 근사한 곳에서 데이트하기에 적절한. “저기 맷, 혹시 이거 데이트일까요?” 카렌은 맷의 팔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니죠.” “아쉬운 거 맞죠?” 그들은 사이좋은 연인처럼 팔짱을 낀 채 밤거리로 나섰다. 맷이 케인을 가볍게 좌우로 탁탁 치며 길을 터 나갔다. 가벼운 농담이 오갔다. 산듯한 저녁 공기 덕분에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그들은 곧 대로변으로 나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새까만 리무진 앞에 다다랐다. 맷은 카렌의 도착했다는 속삭임에 걸음을 멈췄고 손을 뻗어 더듬더듬 리무진의 뒷좌석 문고리를 찾아 당겨 열었다. 카렌은 고맙다는 의미로 맷의 뺨에 짧게 입 맞추었다. 맷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클래식 정장, 아름다운 드레스, 근사한 미소, 그리고 고급 리무진까지. 누군가는 이 근사한 밤을 충분히 즐길 테고, 또 누군가는 근사한 밤을 준비하기 위해 사용한 비용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즐기는 사람이 맷 머독과 카렌 페이지라면 걱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포기 넬슨이었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모니터 앞에 앉아 지시를 내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남남 파트너보단 남녀 파트너가 이번 일에 더 이득이었다. 해킹한 CCTV를 포기가 모니터링하며 맷과 카렌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포기는 슈퍼히어로의 사이드킥이 된 기분이라며 너털웃음을 짖긴 했다. “포기는 잘 있겠죠?” 카렌이 불편한 하이힐을 벗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걸 껴보면 알게 되겠죠.” 맷은 턱시도 안주머니에서 꺼낸 인이어를 건넸다. [내 말 들려? 맷?] 이어폰 너머로 큼큼 목을 푸는 포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 나에요, 카렌.” [어이쿠, 카렌! 맷이랑 인이어 바뀐 거 같아요. 빨리빨리 바꿔요!] 누가 어떤 인이어를 끼든 상관없을 테지만 복잡한 장비가 가득한 방에서 헤드셋을 끼고 모니터를 주시하며 지시 내리는 역을 맡은 사람은 포기였다. 맷과 카렌은 어깨를 으쓱하곤 인이어를 교환했다. 제대로 된 인이어를 끼자 포기는 자신 쪽으로 고개 좀 돌려보길 주문했다. 맷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카렌은 특별히 CCTV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윙크해 주었다. [드레스가 멋져요, 카렌.] 포기는 곧 자신이 엄지를 척 내밀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리무진은 곧 아무런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헬스 키친의 저녁 거리를 매끄럽게 나아갔다. 초소형 마이크까지 옷 속에 감추어 달고 나서야 맷과 카렌은 편히 좌석에 몸을 기댔다. 목적지까지 도착하기엔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끝내주게 비싼 리무진의 착석감은 어떠냐는 포기의 장난을 끝으로 회의에 들어갔다. 목표는 고급 호텔의 키 카드였다. 그 키 카드로 들어갈 수 있는 방엔 이틀 후 열릴 공판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USB가 있었다. 최근 등장한 신생 건축회사가 헬스 키친 재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는 일파만파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몇몇 매체에서는 회사의 명성을 치켜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헬스 키친이란 곳은 뻔하디뻔한 곳으로, 신생 건축회사는 뒤가 구린 별 볼 일 없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세상에 밝히려는 내부 고발자가 넬슨 머독 앤 페이지의 첫 의뢰인이 된 것이 발단이었다. 첫 의뢰인을 찾아낸 사람은 카렌이었다. 포기는 대체 이런 의뢰인을 어떻게 찾아냈느냐 묻기 전에 정말 카렌답다는 칭찬을 먼저 했다. 재판엔 내부 고발자 A씨가 정리해둔 기밀문서가 필요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료를 선수 친 인물이 있었다. A씨의 직장 동료로, 좋게 말하면 남자친구이자 날카롭게 말하면 섹스파트너였다. 회사에 헌신적인 X에게서 여려 자료를 빼오기도 했던 A씨는 문서가 든 USB가 사라지자 곧바로 X를 의심했다. 넬슨 머독 앤 페이지는 꽤 간단한 방법으로 X를 도청했고 그에게 USB가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얻었다. 간단한 방법이란, 맷 머독의 조금 특별히 밝은 귀를 사용한 것, 정도. X가 회사 측에 자료를 넘기기 전 다시 자료를 훔치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해결책이란 의견이 나왔다. 물론 맷 머독의 의견이었다. 포기가 이에 반박하려 했으나 카렌이 융통성 있게 우리는 물건을 불법적으로 훔치는 게 아니라 되돌려 받는 것뿐이라는 주장을 강력히 내세웠기에 그들은 리무진에 몸을 싣게 되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 내기 하나 할까요?] 포기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무진이 곧 목적지에 도착할 참이었다. “포기.” 포기 넬슨의 오랜 친구인 맷은 자신의 오랜 친구가 무슨 내기를 제안할지 뻔히 알았기에 핀잔을 줬다. 어쨌든 이젠 포기를 겪을 만큼 겪은 카렌도 포기가 꺼낼 ‘내기’가 무엇일지 알아차린 듯했지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그렇지 않아요?] * 맷은 행사 가드의 안내를 받아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손끝에 곧 단단한 입간판이 닿았고 볼록하게 솟은 점자를 읽을 수 있었다. “맹, 인을 위한...자선 행사.” 점자가 필요 이상으로 컸고 간격도 엉망이라 이 점자를 읽는 맹인들은 모두 맷처럼 더듬더듬 한 글자 한 글자 더듬더듬 읽어야 할 테였다. “잘 읽어주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을 위한 자리입니다.” 입간판 옆에 서 있던 행사 스태프가 맷의 가슴에 작은 꽃을 달아주었다. 그리고 나서야 맷은 가드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행사장 입구로 향할 수 있었다. 의뢰인 A씨의 평가에 의하면 적당한 허영심을 가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라는 X가 참석하기에 매우 적당한 행사였다. 더불어 건축 회사 측에서 행사장 건축에 관여하기도 했다는 정보도 있었다. 맷은 자신을 안내하는 가드에게 주최자의 명함을 받는 일을 잊지 않았다. 명함에는 점자가 없다며 명함 주기를 망설이는 가드에게 “제게는 앞이 보이는 친구들도 있으니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나서야 맷은 카렌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맹인이 아닌 그녀는 이미 행사장 입구에 서 있었다. 카렌이 괜찮으냐 묻자 맷은 자신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눈썹을 찡긋거렸다. “유쾌하진 않네요.” “이번만 참아줘요. 세상엔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이 많으니까요.” “동감이에요.” “자, 그럼 이제 우린 무엇을 하면 될까요?” 그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포기가 말을 얹었다. [목표물을 찾아야죠. 어깨에 닿을 정도 길이의 블론드에 선명한 푸른 눈. 아, 머리를 묶고 있을 수도 있다고 했고요. 반짝거리는 미소 짓는 걸 좋아한다고 했던가요?] “맞아, 포기. 정확히 그렇게 말했지.” 셋 모두 X가 어떤 인물일지 쉽게 예상했고 그만큼 빨리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맷은 카렌에게 팔을 내어주었고 그녀는 인이어를 마지막으로 고쳐 끼곤 맷의 에스코트를 따랐다. 그들은 가장 먼저 행사장을 천천히 크게 빙 둘러 걸었다. 거대한 홀은 총 세 곳으로 나뉘어 있었고 세 곳 모두를 도는 데는 필요 이상의 시간이 들었다. 사람도 많았으며 맹인 또한 많았기에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누비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카렌과 맷은 가장 먼저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마련된 경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매 상품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유리 전시장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맹인을 위한 행사치고 맹인은 경매 상품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이 맷은 유감스러웠다. 그는 그저 전시장의 유리를 손가락으로 슥 훑고 지나쳤다. CCTV의 위치와 개수, 사각지대, 개인 공간이나 화장실의 위치 등을 파악한 후 카렌은 어디선가 들고 온 샴페인을 맷에게 건넸다. 논 알코올? 물론이죠. “나뉘어서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죠?” 카렌이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어쩌면요. 무모한 짓 하지 말고요.” “그건 내가 할 말이에요, 맷.” 카렌은 맷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자자, 그럼 우리 내기하는 거 맞죠? 그렇지, 맷? 네 플러팅 실력이 이번에도 빛을 발하는지 난 좀 궁금하단 말이지.] 포기의 내기 타령은 A씨가 X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설명할 때 나온 말로 시작되었다. 그는…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죠.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시시덕거리길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남녀 안 가리고요. 그러니까, 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포기 넬슨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 분명했다. 내기라고 하기도 민망한 일에 포기는 벌써 마음속으로 돈도 걸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 걸었는지는 친절하게도 밝히지 않았다. 룰은 간단했다. X를 먼저 찾아내 그의 관심을 끌고 키 카드를 얻어내는 사람이 이기는 것. 훔치든 얻어내든 그 방법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고, 내기의 주최자인 포기가 흘린 말을 맷은 똑똑히 들었다. 적당히 하라니까, 포기? 맷이 또 타박했다. “유치하긴 하지만 동기부여도 되고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죠.” “카렌! 당신마저.” 카렌은 작게 웃었고 먼저 출동해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카렌한테 지지 말라고, 친구.] [저도 다 들려요, 포기] 맷은 이마를 긁적이며 한숨을 푹 쉰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X를 먼저 발견하는 쪽은 카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런 순간에 불변의 강점으로 작용할 테니까. 따라서 맷 머독은 가장 먼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코를 통해 숨을 크게 들이마셔 폐를 부풀렸다. 낯선 장소, 낯선 대중, 낯선 환경. 낯섦 속에서 초감각은 청각 쪽으로 예민해지기 마련이었다. 오늘은 ‘청각’보다 다른 감각에 더 날을 세워야 했지만. ‘시트러스, 탈락. …라벤더, 탈락.’ 맷은 카렌과 그러했듯 행사장을 천천히 거닐었다. 탁탁, 케인의 끝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다가 곧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곳으로 이끌려 갔다. 맷이 ‘후각’을 통해 찾는 정보는 단 한 가지였다. X가 즐겨 사용한다는 고급 향수의 희미한 끝향. 맷은 단번에 수십 명의 사람 사이에서 수십 가지 체향을 습득했다. 그 분류 작업 또한 찰나에 이루어졌다. 툭툭, 케인의 끝이 카펫을 두 번 두드릴 때마다 탈락하는 향기가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맷은 어떤 향을 포착했다. 의식했다기보단 본능적으로 그 향에 이끌렸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눈까지 번쩍 뜬 후에야 맷은 이 향이 정확히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선 행사와 어울리지 않는, 화약 냄새. “젠장.” 맷의 탄식에 포기가 무슨 일 있느냐 물었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것에 가까웠다. 화기애애 인사를 나누고 담소를 주고받으며 얼굴엔 미소가 만연한 사람들 사이, 미소와는 일절 인연이 없는 남자가 맷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초감각으로 그의 표정까지 정확히 읽기는 어려웠으나 맷은 그가 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묵직한 향기, 냄새라고 말하는 쪽이 더 맞을 수도 있었다. 지워지지 않고 겹겹이 쌓이고 엉킨 화약 냄새는 맷의 예민한 감각엔 악취와 다를 바 없었다. 악취를 두른 남자는 이 뉴욕시티에서 ‘퍼니셔’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런, 맷. 내가 누굴 본 줄 알아?] “내가 할 소리야, 포기. 저 인간이 초대 명단에 있다고?” [그럴 리가. 퍼니셔가 맹인 자선 행사에 초대받았을 리 없잖아!] 맷은 일부러 그를 등졌다. 소용없는 짓이라 생각하면서도. 프랭크 캐슬이 이런 자선 행사에 참석할 이유는 자신 때문이 분명하다고, 맷은 단정 지었다. 맷 머독이 이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밖에 없었다. 맷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득을 얻기 위한 계산. 데어데블이 누군가를 때려눕혀야 하는 헬스 키친의 검은 골목 안에서 그와 마주친 상황이었다면 그는 꽤 괜찮은 데어데블의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기꺼이 데어데블에게 사용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 화려한 샹들리에 빛으로 둘러쌓인 허상을 좇는 자선 행사에서.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프랭크 캐슬은 정장을 입었을 것이다. 맷은 자신이 입은 검은 클래식 정장을 똑같이 입은 프랭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보타이까지 맨 그가 이곳에서 과연 도움이 될까? 턱시도를 입은 프랭크는 레드 와인을 홀짝이며 레드, 라는 호칭을 중얼거리며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맷 머독은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함께 레드 와인이라도 한 모금……. [맷!] “어, 포기.” [내 말 듣고 있어?] 맷은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인이어를 슬쩍 고쳐 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맷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는 그 남자만의 특이한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랭크는 인파에 묻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왜지? 왤까? 맷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그의 발끝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은 언제인지를 주시했다.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 다만 지나가는 행사 스태프을 잠시 붙잡아 공짜 와인을 하나 받아 든 것뿐이었다. 레드 와인일까?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포기의 질문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었다. 아무렴, 사실 맷 머독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까슬한 화약 냄새를 지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맷은 다시 긴장의 끈을 기민하게 잡아당겼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법한 호불호 없는 향. 익숙한 것에 고급스러움을 한 방울 떨어뜨린 향기를 따라 맷은 케인을 짚었다. 행사장을 밝게 만드는 잔잔하고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몇 걸음 앞에 소규모 악단과 악단의 연주에 몸을 맡긴 무리의 존재가 느껴졌다. 맷은 악단 쪽을 바라보면 미소 지어 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의 미소를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한 이유는 고급스러운 향기를 두른 장신의 남자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내기에서 이겨버렸네요. 미안해요, 카렌.’ 맷은 짧게 내기를 상기했다가 바로 옆까지 다가온 남자에게로 신경을 기울였다. 맷의 겉모습은 그저 악단의 잔잔한 음악에 이끌려 온 선량한 맹인이었다.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처럼 보이는 일은 누군가에겐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방법은 잘 먹혀들었다. 확실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신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X는 중저음 목소리로 맷에게 인사를 건넸다. 본래 목소리를 힘들여 낮춘 느낌이 물씬 들어 맷은 속으로 빙글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 편이죠.” 맷은 안경을 고쳐 쓰는 척하며 인이어를 빼 주머니 속으로 숨겼다. 타겟에게 가까워졌을 때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CCTV가 있는 쪽으로 슬쩍 얼굴을 비추며 포기가 자신이 X와 마주쳤다는 사실을 발견했길 바랄 수밖엔. X는 곧 맷이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피스크를 헬스 키친에서 완전히 몰아낸 변호사님 아니십니까? 남자는 아마 반짝 빛난다는 그 미소를 맷에게 보였을 것이다. 맷은 그의 목소리와 손을 마음대로 잡아 오는 손길에 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맷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를 아시는 분 같은데 저도 그쪽을 알고 있을까요?” “이거 실례했군요.” X가 중얼거렸다. 맷은 그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잠시뿐이었다. 그가 아주 오래도록 맷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쓸었기 때문이었다. 바라는 바가 있다는 듯. 그리고 분명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맷은 짜증스럽게 눈을 굴렸다. 붉은 안경이 눈을 곧잘 가려주리라 확신한 덕분이었다. 곧 악단의 노래가 끝이 났다. 맷은 그들을 향해 가볍게 박수를 쳤다. X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적절한 핑계였다. X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잠시 가드 한 명을 부르더니 은밀히 메시지를 전했다.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맷은 그 메시지를 엿들었다. X는 악단에 곡 연주를 주문하고 있었다. 맷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우습다고 생각한 까닭에.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 조금 경멸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X는 다음 곡이 시작되자 맷의 어깨를 감싸곤 귓속말로 속삭였다. 한 곡 어떠신가요, 머독 씨? 그 순간 훅 가까워진 인영 때문에 맷은 하마터면 뒤를 돌아볼 뻔했다. 다른 이로 착각할 수 없는, 프랭크 캐슬이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X는 꽤 정중하게 맷을 살폈고 맷은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맷은 차근차근 프랭크의 기척을 살폈다. 생각보다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 점이 맷을 당혹스럽게 했다. 겨우 몇 걸음 가까워진 프랭크 캐슬이 X의 향수 향보다 더 강렬하게 맷의 초감각을 건드렸다. 화약 냄새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자 특유의 옅은 땀 내음과 낡아빠진 은신처에서 달고 나왔을 답답한 먼지 냄새, 타인의 것인지 본인의 것인지 모를 비릿함이 반쯤 날아간 말라붙은 피 냄새, 복합적이면서 덕분에 유일한 냄새가 맷을 놀라게 한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변화를 X가 알아차렸는지 그의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졌고, 맷은 그것을 좋은 징조로 생각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맷과 X만이 춤을 추기 위해 무대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맷이 감각하기에 앞이 보이는 사람뿐 아니라 파트너를 따라 스텝을 밟는 맹인 또한 여럿 되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완전히 기대고 의지하고 있었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부드럽게 시작한 연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벌써 질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가실까요?” X가 손을 내밀기에 맷은 케인을 접어 X에게 건넸고 X는 옆을 지키던 가드에게 그 케인을 다시 건넸다. X는 맷의 손을 잡고 바이올린의 감미로운 음색에 섞여 들었다. 맷은 꽤 실력 좋은 댄서였다. 대학 시절 포기가 항상 재수 없다고 입이 닳도록 말한 대학교 사교 모임에도 재미를 붙였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오늘은 그 춤 실력을 발휘할 적절한 날이 아니었다. X에게 모든 리드를 넘기는 것이 반대로 맷에게 있어 말의 고삐를 잡는 일과 같았다. X가 이끄는 대로 맷은 춤에 서툰 사람을 가장했다. 박자도 대부분 틀렸고 스텝이나 제스처도 전혀 부드럽지 못했다. 그럴수록 X는 즐거워했다. 남의 모자람을 자신의 뛰어남으로 치환해버리는 고약한 사람이 분명했다. 키 카드만 챙긴다면. 맷은 지금이 조시즈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흘러가듯 이야기할 농담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어느 순간부터 X의 고급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고 뇌를 흔들어 놓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매우 유쾌하지 않은 쪽으로. X가 키 카드를 어느 주머니에 넣어두었는지만 집중하여 알아낸다면 시간문제임이 분명한데 그 하나가 가장 어려웠다. 맷은 점점 표정을 숨길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향수를 들이부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로 싸구려 인상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졌다는 뜻. 맷은 X의 리드에서 벗어나 뒤로 한 발짝 물러서려 했다. 그때 맷이 눈치채지 못한 것은 마침 연주가 끝날 타이밍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맷과 X의 곁을 평범한 행사 참석자처럼 맴도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마침내 연주가 끝나고 스텝을 밟던 수 많은 사람의 발 또한 일제히 멈춰 섰다. X는 맷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할 말이 있다는 듯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는 동안 맷은 식은땀을 흘렸다. “파트너를 바꾸기로 하죠.” 맷의 귓가에 들린 목소리는 X의 것이 아니었다. 정중한 목소리와 그렇지 못한 손길. 맷의 허리를 감은 손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다. “프랭크?” 맷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이름에, 이름의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맷을 X에게서 거의 빼앗듯 제 품으로 끌고 오며 자신과 함께 있던 여성 파트너를 X에게 부드럽게 넘겼다. 이런 식으로 예고 없이 다루어지는 일은 정말 매너 없는 짓이라고, 시력을 잃은 후부터 항상 고수하던 맷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어쩐지 안심되었다. 허락 없이 어깨를 감싼 손이라던가 강하게 끌어당기는 악력이라던가, 모든 게 괜찮았다. 뇌를 쥐어짜는 듯한 향기가 멀리 떠난 덕분이리라. 다음 곡이 시작되었고 이번 곡 또한 누군가 주문한 연주인 것만 같았다. X는 아닐 터였다. 맷은 프랭크의 손에 이끌려, 그리고 그의 리드에 맞추어 자신도 모르게 스텝을 밟아 나갔다. 한 걸음 물러설 때 다가가고 다가가니 멀어지는 매끄러운 움직임이 이어졌다. 다급하지 않았고 정확한 박자와 함께 출처 모를 여유로움마저 있었다. X보다 프랭크가 훨씬 뛰어난 춤 실력을 가졌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맷은 프랭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역시나 턱시도를 입었군. 맷은 고개를 조금 숙여 숨을 들이마셨다. 코의 점막을 스치는 체향을 맡았다. 프랭크가 손을 맞잡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 전까지. 자연스러운 블루스 동작이었지만 맷은 놀랐고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해 톡 쏘듯 말을 내뱉었다. “뭐 하는 짓이지, 프랭크?” 낮은 웃음소리가 답변처럼 맷의 귓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맷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게 춤을 가르쳐주고 있잖아, 머독.” “뭐?” “네 춤 선생님이 끔찍하게 춤을 못 추기에 말이야.” 한숨 섞인 한마디 한마디가 맷의 귓바퀴와 귓불, 때로는 귀와 목의 경계 어디쯤 부딪혀 흩어졌다. 피부에 난 솜털이 바짝 서는 감각이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았다. 맷은 입술을 말아 물며 경고했다. 지금 너와 장난칠 시간 없어. “피차일반이야. 나도 일하러 왔거든.” 그렇게 대꾸한 프랭크는 갑자기 맷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렇다고 완전히는 아니었다. 서로의 손끝만 맞잡은 채 맷은 프랭크에게서 밀려났다.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이들 중 누군가가 짧게 박수를 쳤다. 맷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프랭크가 손을 잡아당겨 단번에 맷을 제 품 안으로 이끌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온 줄 알고 있던 모양이군, 머독.” 맷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어떻게 몰랐겠어, 라고 말하고픈 마음도 있었으나 프랭크의 다음 말 덕분에 그런 욕구는 완전히 사라졌다. “나를 의식하고 있었나 봐, 변호사님.” 변호사님, 이라니. 놀리는 말투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맷은 미간을 찡그리곤 대답하지 않았다. 악단의 악기가 내는 음색은 물결 같았고 프랭크와 맷은 그 물결 사이를 유영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맷은 피부로 살결로 느꼈다. 스텝을 밟는 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은 찰나에 불과했다. 왼발을 뒤로 무르기에 맷은 제 오른발을 앞으로 불쑥 내디뎠다. 곡조는 차차 클라이맥스를 향해갔고 덕분인지 심장이 조금은 뜨거웠다. 어쩌면 이 열기가 본인에게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맷은 생각했다. 그 생각은 얼추 맞았다. 그는 모든 감각을 훨씬 더 강렬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순간 맷은 주도권을 잡고 싶었다. 그 욕구를 인정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고 어쩐지 자신감마저 들었다.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프랭크도 마주 미소 짓는 것 같았다. 미소와는 인연이 없는 줄만 알았는데도. 그제야 맷은 프랭크와 닿아 있는 손으로 정보를 읽어냈다. 어깨에, 조금은 가슴팍에 가깝게 올려두고 있던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고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명확한 정보였다. 배경으로만 들려오던 연주 소리가 동화되어 있었다. 빠르게 펌프질하는 심장 박동에, 온전히. 맷은 무엇인가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무엇인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곡이 곧 끝나리란 사실을 맷도 알았지만 그때까지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웬걸, 이번에야말로 맷은 프랭크에게서 완전히 놓아졌다. X에게서 맷을 빼앗아 왔던 때와 비슷하게 그러나 훨씬 더 부드러운 손길로 맷은 또 다른 파트너에게 넘겨졌다. “카렌?” 맷은 깜짝 놀라 스텝이 조금 엉켰지만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일만큼은 면했다. 조금 전 춤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뛰어났기 때문인지 그저 카렌이 타이밍 좋게 맷의 허리를 붙잡아 주었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던 감각은 물론이고 코끝에 맴돌던 희미한 화약 향마저 순식간에 자리를 떠나버렸다. 맷을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어깨 한 번 부딪히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발자국만을 짧게 느꼈다. 곧 놓쳐버렸지만. 본인이 할 일이 있다곤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나 갑자기 떠나버릴 일이었나.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예요?” “네?” “인이어 껴요, 맷.” 카렌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주머니를 뒤져 인이어를 겨우 찾아낸 맷은 인이어를 귀에 끼면서도 카렌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카렌이 음악에 맞춰 한 걸음 다가왔고 맷은 겨우 반 발짝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맷은 주위를 귀 기울여 살폈는데 그가 어디로 가버렸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수십 가지 향기가 그의 후각을 이미 마비시킨 후였다. 카렌은 상체를 가까이 붙이는 것 같더니 구두 앞코로 맷의 발을 콱 밟았다. 맷은 신음을 겨우 삼키며 어색하지 않게 연주 선율을 뒤따랐다. “키 카드는 내가 빼왔어요. 맷은 그동안 뭐 한 거예요?” * [맷, 너 때문에 돈만 날렸어.] 인이어로 포기의 한탄이 들려왔고 카렌이 장난스럽게 야유했다. 나한테 걸지 않은 거예요? 카렌의 말에 포기는 갑자기 쩔쩔매는 사람이 되어 자신이 맷 머독의 여우짓을 보아온 경력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카렌은 어찌 됐든 내기에 건 돈만 준다면 용서해주겠단 식의 장난을 쳤다. 작전이 성공했기에 그들은 희희낙락 장난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행사장 위층을 차지한 호텔이었다. X가 주말 동안 묵기로 예약해둔 호텔이자 키 카드의 진가가 발휘될 장소이기도 했다. 카렌이 앞장서며 비상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발이 아픈지 하이힐을 손에 쥔 채 맨 발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할 일 좀 잘하라는 포기의 타박이 떨어졌다. 맷은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결국 케인도 찾지 못하고 잃어버린 판에 맷은 약간 울상이었다. 그때 음성 메시지 한 통이 맷의 휴대전화에 도착했다. 띠링. 짧고 경쾌한 알림 소리. 맷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이제와서 또 무슨 할 얘기가 남았다고. 충분히 무시할 수도 있었다. 언제든 나중에 확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맷의 계단을 오르는 보폭을 천천히 줄였다. 포기와 대화 중인 카렌의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고 마지막으로 인이어도 잠시 뺐다. 그리고 확인한 음성 메시지. 음성 메시지는 참으로 간결했다. 머독, 내 춤에 반했나? 그렇다고 싫지도 않았다.

Frank Castle & Matt Murdock's Slow-dance
by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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